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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루의 한국사 문제편 ⑮] 발해의 황금기, 무왕·문왕·선왕 고급형 3제 문제 본문

한국사이야기

📘 [마루의 한국사 문제편 ⑮] 발해의 황금기, 무왕·문왕·선왕 고급형 3제 문제

역사-마루 2025. 6. 27. 00:12

고구려의 후예, 발해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왕들의 업적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발해 마스터!

 

태그
#발해문제 #무왕문왕선왕 #발해왕업적 #한국사문제 #해동성국 #남북국시대 #고대동아시아 #한국사심화

 

시험팁: 출제 포인트 요약

  • 무왕: 인안 연호, 당과 군사적 충돌, 장문휴의 원정
  • 문왕: 3성 6부, 상경 천도, 당 문물 수용, 황제국 선언
  • 선왕: 해동성국, 최대 영토 확장, 지방행정 완비
  • 문화사: 온돌, 고구려+당 양식 공존, 정혜·정효공주 묘
  • 외교사: 일본·신라·당과의 복합 관계 분별

✍️ '마루의 한국사 이야기 ⑮편' 심화 문제 시리즈


문제 1. 다음 자료에 나타난 (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사료 읽기>

(가) 왕은 즉위 후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동생인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하여 도발하자, 장문휴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바다 건너 당의 등주(산둥반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한때 신라, 당과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등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①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옮기고 3성 6부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②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설하였다.
③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발해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④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⑤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황제국임을 의미하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자료는 독자적 연호 '인안' 사용, 당나라 등주 공격 등의 키워드를 통해 발해의 2대 왕인 무왕(武王)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왕은 이름처럼 강력한 군사 활동을 통해 북쪽의 여러 말갈 부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오답 해설]
①, ②, ⑤ [함정!] 모두 무왕의 아들인 문왕(文王)의 업적입니다. 문왕은 아버지와 달리 당과 우호 관계를 맺고 문물을 수용했으며,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업적을 헷갈리게 섞어 놓은 문제입니다.
③ '해동성국'이라 불린 최전성기는 선왕(宣王) 때의 일입니다.

문제 2. 다음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발해 문화의 특징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발해 유적·유물 탐구>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 터에서는 다수의 온돌 장치가 발견되었다. 한편, 수도의 전체적인 구조는 당나라의 장안성을 모방한 주작대로를 갖춘 계획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문왕의 딸인 정혜공주 묘에서는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의 굴식 돌방무덤이, 정효공주 묘에서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 양식이 나타났다.

① 고구려의 문화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만 집중하였다.
② 당나라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모방하여 고유의 특색을 잃었다.
③ 고구려 문화를 기반으로 당의 문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④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세련된 귀족 문화를 꽃피웠다.
⑤ 지배층은 고구려 문화를, 피지배층은 말갈 문화를 향유하여 문화가 이원적으로 존재했다.

정답: ③

[해설]
제시된 자료는 발해 문화의 여러 요소(온돌, 수도 구조, 공주들의 무덤 양식)가 고구려적 전통과 당나라의 영향을 함께 보여주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뿌리에 두고, 당의 선진 문물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했음을 의미합니다.

[오답 해설]
①, ② [함정!] 자료의 한쪽 측면만 강조한 편향된 해석입니다. 발해 문화는 '계승'과 '수용'이 조화를 이룬 것이 특징입니다.
④ 신라보다는 당의 영향이 훨씬 컸습니다.
⑤ 피지배층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아니며, 제시된 자료는 지배층 문화의 '융합'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 3. 다음은 발해의 어느 왕이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의 일부이다. 이 글을 보낸 (가)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고르시오?

<일본에 보낸 국서>

무릇 여러 나라를 아우르고 여러 번왕(藩王)을 거느리려면 의리에 의거해야만 합니다. 나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 부여의 옛 습속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략) 지금 신라가 무도하여 우리를 신하로 삼으려 하니, 바라건대 군사를 빌려 이들을 응징하게 해주십시오.

①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여 '해동성국'의 기틀을 닦았다.
②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수도를 상경으로 옮겨 체제를 정비하였다.
③ 당의 3성 6부 체제를 받아들여 발해의 실정에 맞게 운영하였다.
④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40여 개 성을 빼앗으며 신라를 압박했다.
⑤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를 선제공격하여 당과 군사적으로 대립하였다.

정답: ⑤

[해설]
제시된 국서는 신라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일본에 군사를 요청하는 내용으로, 당과 신라를 동시에 견제했던 **무왕(武王)**이 보낸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장문휴를 시켜 당의 등주를 공격하는 등 강력한 대외 정책을 펼쳤습니다.

[오답 해설]
① '해동성국'의 기반을 닦고 최전성기를 이끈 왕은 **선왕(宣王)**입니다.
②, ③ 수도를 옮기고 당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3성 6부 체제를 정비한 왕은 무왕의 아들인 **문왕(文王)**입니다.
④ [함정!] 대야성을 공격한 것은 백제의 의자왕입니다. '신라를 압박했다'는 맥락만 보고 헷갈리기 쉬운 함정입니다.


🔗 본편 연결 링크
👉 [마루의 한국사 이야기 ⑮편] 북방의 패자, 발해의 황금기 – 무왕·문왕·선왕이 이룬 ‘해동성국’

 

✅ 🧭 마루의 한마디
무력과 문치, 외교와 정비. 발해의 황금기는 한 왕의 업적이 아닌, 서로 다른 색을 지닌 왕들의 조화로 이뤄졌습니다.